[월간이리1월호] 회사원K__광인일기








11월 19일
나는 이제껏 스스로 평범한 회사원이라 생각하며 살았지만 얼마 전 고골의 책을읽고 내면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몽골의 여왕이다. 저 드넓은 초원, 휘날리는 고비의 모래바람을 가르고 태어난 여왕이었
다. 그렇다면 나는 왜 지금 이곳에 있는가. 아니, 왜 몽골에서 당장 사람을 보내 나를 모시러 오지 않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몽골과 한국은 거리가 멀다. 그들은 분명 오느라 시간이 걸
리는 것이다. 
 
나는 예전부터 사막에 특별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 여행을 하거나 글을 쓰고 생각할 필요가 있을 때, 사막은 나
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언제나 인간에게 비상한 느낌을 주는 저 노란 달처럼, 사막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힘을 전달해주는 곳이다. 사막은 간지럽지도 않고 너무 가볍거나 무겁지도 않으며, 말이 많지도 적
지도 않다. 온통 모래로만 가득 차 있는 세상이란 얼마나 경이로운가. 사막이란 세상의 끝이자 지구가 닫아놓은 
마지막 서랍일지도 모르겠다. 단 한 방울의 물도 없다고 하지만, 사막은 절대 메마른 곳이 아니다. 사막에 눈이 
오는 것을 본 적 있는가? 난 봤다고 믿는다. 내 땅은 사막에 있고 난 그곳의 여왕이기 때문이다. 


 
11월 25일
사무실에서의 삶은 반복적이다. 시계는 언제나 오른쪽으로 돈다. 내 자리는 7층에 있고 내 옆에는 비밀스러운 
동료들이 있다. 그들 중 한 명은 스스로를 해적이라고 생각하며, 책상 앞에 푸른 닻이 그려진 종이를 붙이고 다
녔다. 종종 검은 색 해적 깃발을 꺼내 들거나 손등에 암호와 같은 무언가를 그려넣긴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종류는 아니었다. 내가 몽골의 여왕인데 그가 해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아는 다른 회사원은 스스로 누
우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 후생에 반드시 누우로 태어나 대 이동의 비밀을 풀고 싶다고 속
삭였다. 결국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둔 후 누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비밀을 아는 자는 
거의 없지만, 난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진 회색 사무실에 앉아 있던 그녀가 누우로써의 정체성을 찾아 뛰쳐나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누우는 성냥갑 같은 곳에 있으면 안된다. 
누우의 고향은 아프리카 대 초원이다. 


 
11월 27일
몽골에서 아직 사람이 오지 않았다. 내 연락처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얌전하게 직장 생활
을 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이들에게 내가 몽골의 여왕임을 밝히고 싶기도 하다. 좁
아터진 지하철 틈에 끼어 두 시간을 넘게 오가며 애꿎은 서류가방을 터는, 그런 일반인의 삶을 사는 신분이 아
니라고 밝히고 싶다. 내가 숨겨진 내 정체를 밝히면, 저 우중충한 파티션 사이에 총총히 끼어 앉은 회사원들이 
모두 박수를 치며 나를 경배하고, 당장 여왕의 등장을 알리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왕은 성
질이 아주 고약한데다 다른 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들었다. 지금이라도 분연히 일어나 내가 이제껏 지내왔
던 이 곳의 국민들을 위해 그 저급한 면상을 두들겨 주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는 현명하고 참을성 있
게 나의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기다릴 참이다. 아직은 정체가 밝혀지면 곤란하다. 사막의 여왕이 두르는 기다란 
붉은 색 도포가 아직 오지 않았다. 


 
12월 10일
월식이 있었다. 이것은 징조다. 내가 곧 나의 땅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모두가 곧 모두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12월 23일
왜 몽골의 여왕이 아직도 이 곳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가? 왜 해적은 바다에 있지 않는가? 세상은 한없이 
흥청대고 있었다. 나는 누우임을 자각하고 뛰쳐나온 그녀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몽골에서 사신이 올 때
까지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여러분, 나는 사실 몽골의 여왕입니다!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이 모
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다들 내가 큰 농담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다, 이들은 이미 이 모든 것
에 익숙해져 있다! 왜 몽골의 여왕을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가! 옆자리에 앉은 해적만이 무언가 의미심장
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팀장은 나를 데려가 이것저것 물었고 나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몽골의 여왕이며 이 곳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 여기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심지어 나는 회사에 다니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내 마음대로 저
녁 메뉴를 선택할 수 있기도 하다. 종종 마주치는 어린 녀석들은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요즘 같은 시
기에 직장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내가 입은 셔츠의 색깔이 얼마나 멋있는지 등을 털어놓으며 아부를 떨었
다. 하지만 저녁으로 고기를 먹든 상추를 먹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빨간색을 입든 푸른색 셔츠를 입든 뭐가 그
리 중요한가? 매달 입금되는 계좌를 확인하며 이 메마른 사무실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자
신의 왕이 누구인지, 나의 백성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한 평생을 보내는 자들도 있다고 한다. 나는 팀장과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나의 정체를 아는 나의 충실한 백성들이 그리웠고 아직도 모른다는 표
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왕 없는 이들이 너무 불쌍해 울었다. 

 
 
어느 날
날짜를 알 수 없다. 나는 몽골에 전화를 걸었고 비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나를 빨리 모시러 오지 
않냐고 소리를 높였지만 비자가 필요할 뿐이라는 반복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나는 더 화를 내려다가 그만두었
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렇게 포고를 했음에도 몽골의 여왕이 나타났음을 아직
도 모르고 있다. 나에게 비자가 필요하다고 지껄였던 그 자도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가엾은 자일 뿐이다. 나는 
느리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쳐줄 의무가 있다. 벽 한 쪽에 붙여놓은 사막의 사진이 부글대며 움직이고 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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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이다. 한 가운데 와 있다. 내 땅, 내 조국, 나의 백성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히 이 곳 어디에 있을 
것이다. 나는 마을 어귀에서 만류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길을 나섰다. 이제까지 단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았다. 빛으로 가득한 사막, 온 몸을 휘감아 도는 모래 바람이 호흡을 짓누르고 있다. 그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자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싸움을 필요로 한다. 나는 나를 막아서는 자들과 끝까지 맞섰다. 때
로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때로는 앞으로 나가 호령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한편으로 나를 위로하며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참으로 외로웠다. 몽골에서 연락이 오는 것도 지쳐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여왕의 등장을 막는 세력들이 이렇게나 많은 줄 미처 몰랐다. 누우가 된 그녀만이 나와 깊은 
악수를 하였다. 그것이 큰 힘이 되었다.
 
또 다시 수상한 자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서야 왜 내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그 나라에 
살게 되었는지, 왜 그 성냥갑 같은 사무실에 박혀 있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사람들은 사막
의 여왕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녀가 진실을 말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메마른 
땅에서 태어난 사막의 왕은 신기루에 속지 않는다. 시작도 끝도 없고 경계도 울타리도 없는 사막. 두려운 이들
은 층을 만들고 계단을 만들고 회색 파티션을 만들었지만,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모래 속에 파묻혀 사라질 것
임을 안다. 왕을 만나도 경배할 줄 모르고, 자신의 백성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이들을 묶어 놓고 길들인 
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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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앞으로 가면 나를 기다리는 그들이 있을 것이다. 붉은 색 도포를 휘날리고, 황금색 잔을 두 손에 든 
나의 백성들이 그곳에 서서 여왕인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세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 싯누런 모
래 등걸이 거대하게 꿈틀댄다. 사막이 움직인다. 저 앞에 무엇인가가 보인다. 야자수, 오아시스, 산과 바다, 나
의 붉은 색 왕궁이 보인다. 드디어 나는 돌아온 것인가. 저 앞에 피리를 부는 사람들이 있다. 푸른 색 옷을 입은 
처녀들이 손짓하며 여왕의 귀환을 반긴다. 새가 날아들고,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막의 
노래가 들려온다. 나는 카펫 위에 몸을 뉘였다. 입 속으로 모래가 흘러들어온다. 하지만 아직 더 찾아야 할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사막에 눈이 내린다. ** 







* 상수동 [이리카페]의 [월간이리] 1월호에 투고된 글입니다. 아래 링크를 타고 들어가면 해당 원본을 볼 수 있습니다.
http://postyri.blogspot.com/2012_01_01_archiv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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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
  1. intolife 2012.03.17 17:49 신고

    데미안님이 투고 하신 글인가요?
    아니면 다른 분이 투고하신 글인가요?
    글만 읽어서는 데미안님이 투고하신 글 같네요. ^^a
    잘 지내고 계시죠?
    전 요즘 회의 전문으로 명성(?)을 날리는 중입니다.
    너무 회의가 많아서 일주일에 꼬박 3일은 회의만 하고 있네요.
    정말 회의는 적성에 맞지가 않는 데, 매일 하고 있으려니 힘드네요.
    저도 광인일기 같은 거라도 쓰고 좀 일탈을 해야 할까 봅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 Favicon of http://mephisto9.tistory.com BlogIcon Demian_K 2012.03.20 10:43 신고

      네 제가 쓴거 맞아요^^ 그나저나 회의의 대가로 명성을 날리는 중이시라니... (아아 회의의 압박...ㅠㅠㅠㅠ) 매일 긴장속에 계실테니 힘드시겠어요.ㅠㅠ 그래도 프로니까! ㅎㅎㅎㅎㅎ

      힘찬 한주 보내세요>_<!b

  2. 의연민단 2012.03.22 14:18 신고

    안녕하셔요, ^^
    의연,민,단이 세 자매의 아빠, 의연민단 입니다.
    샴페인님 께서 강력 추천해주셔서,
    고맙게도 이런 신세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조만간 가족과 함께 저지를 저의 발칙한 계획에
    이곳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글들을
    커다란 안내서로 삼아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미리 고맙습니다.
    늘 행복하셔요, ^^

    • Favicon of http://mephisto9.tistory.com BlogIcon Demian_K 2012.03.23 10:05 신고

      아이고~^^; 샴페인님께서 소개해주셨군요! 너무 반갑고 감사합니다!! 가족과 함께 어떤 멋진 계획을 갖고 계시는지 몰라도, 이곳에서 즐거운 이야기 많이 나눴으면 좋겠습니다.ㅎㅎ제가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블로그를 소홀히 했는데, 왠지 다시금 힘이 나네요!^^ㅎㅎ

      여튼 반갑습니다! 의연민단 세 자매에게도 안부 부탁드리구요! 종종 이곳에서 만나뵙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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