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입속에 검은 한줄기 이파리를 담고 희미한 절망과 막다른 사랑을 노래한 見者. 안개깔린 꽁꽁 언 포토밭 묘지에서 일 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찬밥처럼 방에 담긴 쓸쓸한 어른. 과연 그 누가 이보다 더 뜨거운 차가움을 표현해낼 수 있을까

3월 7일, 기형도 타계 20주년, 빈 집에 얼굴을 묻고 그를 추억한다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가을이었다. 교정 곳곳은 졸업반 학생들의 흥분과 두려움으로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퇴고한 논문을 교수님께 부쳐드리며 진눈깨비를 적어드렸다. 교수님은 너무 이른 시라고 하셨다. 낡은 각오들이 달각거리고 어깨에 떨궈진 밤 눈을 터는 것은 너무 이른 이야기라고 하셨다. 막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스물 네살 젊음에게 어울리는 시는 무엇일까. 그리고 몇년 후 문득, 버스를 기다리며 밤 눈을 맞고 있던 나는 떨어진 사각 봉투를 주으며 생각했다. 떨어지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진눈깨비. 간판들이 조금씩 젖고, 이런 것은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일생 몫의 경험이 진눈깨비처럼 흩날린다. 잊지못할 시간이 있다. 졸업식을 앞둔 스물 네 살 가을.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며 읽었던 우울하기 짝이 없는 진눈깨비.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내 뿌연 유년의 중심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기형도와 진눈깨비. 그가 아직 살아 있다면 이 갈피없는 젊음에게 또 무슨 이야기를 속삭여주었을까.





 
  1. 나프록센 2009.03.07 19:07

    잘있거라,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옛날 여자친구가 참 좋아했던 시인인데 저는 잘 모릅니다.
    그저 종로 한 3류극장에서 죽었다는 루머만 들었을 뿐.
    그럼에도 그가 제 기억에 박혀있는 건 저 싯구절때문이었습니다.
    20대때는 전혀 몰랐는데 나이먹으면서 열정, 열망, 열의... 이런것들이 사라지더군요.
    30대가 훌쩍 지나면서부터는 뭐든 그냥 스쳐지나가게 되고...

    열정 이런게 더 사라지는 것 보다 더 무서운건 '분노'가 없어진다는 거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계속 희미해지고 있다는 걸 느끼구요.
    대신 '절망'이란 놈이 친구하자고 자꾸 덤비네요.

    데미안님은 끝까지 열망하고 친하게 지내세요.

    무사안착하신걸 축하드립니다.

    • Favicon of https://mephisto9.tistory.com BlogIcon Demian_K 2009.03.08 02:58 신고

      나프록센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보고타에 잘 도착했습니다^^
      '내가 철 들어간다는 것이 이 한몸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드는 거라면 내 결코 철 들지 않겠다' 대학생때, 이 노랫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분노하고 비판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갔던 것은 그 때 뿐이었던 것일까요? 열정은 그냥 매력적으로 달뜬 젊음의 특권뿐인 것일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프록센님은 분노가 없어지고 절망이 고개를 든다는 것에 '절망'하고 계시지만 그 또한 더 나은 나를 위한 '열망'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요. 절망하지 않으려 끝까지 생에 대한 열정을 부여잡는 뜨거운 하루들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2. 남일우 2009.03.12 09:39

    잘 도착하셨나 보네요.
    전 아직도 워싱턴 근교에서 지지리 궁상입니다. ㅡ.ㅡa
    협력회사에서 제대로 협력을 안 해줘서 일이 도무지 진전이 없네요.
    이번 주에는 들어가나 했는 데, 금요일이나 되어봐야 알겠네요.

    전 시와는 별로 친하지가 않아서, 누구신지 잘 모르겠네요.
    지금 시라고 하니 기억나는 건 술익는 마을이 들어간 시~
    술을 좋아해서 그런지 술익는 마을이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

    • Favicon of https://mephisto9.tistory.com BlogIcon Demian_K 2009.03.15 01:45 신고

      intolife님이신가요? 대화명이 달라져서 순간 누군가 했네요^^;ㅋㅋ
      많이 바쁘시지요? 술 익는 마을 저도 그 시 좋아해요. 일전에 서울 어드멘가 특이한 간판을 본적이 있는데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를 패러디했는지 '사발에 술 내리는 마을'이라고 적혀있더라구요. ㅋㅋ한참 웃었더랬죠.ㅋㅋ

  3. Favicon of https://www.redmato.com BlogIcon 호련 2009.03.12 14:41 신고

    ^^ 기형도님의 시.. 대학시절 배우고 친구들과 그 분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나누던 때가 떠오르네요. (친구가 무척 좋아했죠!!!)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엄마를 기다렸다는 내용의 시가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 Favicon of https://mephisto9.tistory.com BlogIcon Demian_K 2009.03.15 01:43 신고

      저도 엄마생각이라는 그 시 정말 좋아해요. 찬밥처럼 방에 담겨라는 그 구절은 두고두고 떠오르지요. 제가 지금 기형도 시인이 20년동안 지냈다는 그 동네에 살고 있는데 안개라는 시의 배경이라 그런지 안개가 가끔 낄때마다 기형도가 더욱 떠오르더라구요. 개인적으로는 요절해서 가장 안타까운 예술가예요.ㅠㅠ

  4. intolife 2009.03.15 03:30

    무심코 이름을 적었나 보네요 ^^a
    헷갈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금요일이 지났고, 결론은 아직도 귀국은 못 하고 있습니다. 하하 ^^a
    그래도 이번주에 진전이 있어서 다음주에는 귀국을 할 것 같네요.
    2주 예정으로 나왔는 데, 4주를 지내고 들어가게 되네요.
    항상 이렇게 출장이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니까 아내가 매번 출장 때마다 고무줄 출장이라고 하더군요.
    올 해는 경제가 어렵다고 회사에서 출장 시 일비도 삭감했는 데, 최대한 짧게 다녀야 겠습니다.
    회사에서 출장도 자제하라고 했었는 데, 제가 하는 프로젝트는 좀 덩어리가 크다보니까 출장을 자제를 안 해 주네요.
    그나저나, 4월 초에 다시 출장이 예정되어 있는 데, 들어갔다가 1~2주 후에 다시 나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시고요.
    항상 웃고 사시길 바라겠습니다 ^^*

    • Favicon of https://mephisto9.tistory.com BlogIcon Demian_K 2009.03.15 09:36 신고

      하하 그랜드캐년 사진을 보내주셨을때 메일로 성함을 언듯 본것 같아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나저나 정말 고무줄 출장이시네요. 하지만 요즘 다들 어렵다는데 일거리가 많은게 오히려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일까요?^^
      벌써 주말이네요. 시간 참 빨리갑니다~
      즐거운 일요일,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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